가을비
가랑비가 간간이 내렸다
보도블록도 숨을 쉰다
에어컨도 한숨을 돌린다
잠시 내려준 비가 고맙게도
세상을 다른 빛으로 물들였다
바람결 결마다
가을향이 물씬 풍긴다
초록이들이 훌쩍 자라 있다
풀향기 풀풀한 그 길을
거닐며 사색에 잠긴다
내 인생에도 어느덧
가을이 왔구나
열심히 살았건만
앞만 보고 달렸건만
그리 수확할만한 건 없다
자책할 필요 없다고 본다
내 인생에 아직 남은 여백이
많지 않은가
가을에 가을을 맞는 느낌
거울 앞에 서 있는 기분
올가을은 색다른 빛깔로
물들일 수 있을 것 같은
묘한 설렘이 좋다
간절히 바래고 바래도
새침데기처럼 얼굴 한번
보여주기 인색했던 여름 비였지
가을비는 속절없이도 내려주네
기다리지 않아도 기다려도
주르륵주르륵
너무 잦은 비로
가을이 성큼 깊어가면
어쩌나 겁이 납니다
가을은 담고 싶은 빛깔이
너무도 많아서
부디 더디 가시길 바랍니다
가을엔 좀 더 가을스럽게 살고 싶다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며
내가 매일매일 듣는 음악 선율
하나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며
내가 습관처럼 마셔대는
커피 한잔 한잔에도 의미를
부여하며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올가을엔 이가을의 깊이만큼
깊어진 나를 만나리라
기대해봅니다.